아낙시만더Anaximander는 별들의 발광을 설명하면서, 천구 뒷편에 있는 빛이 구멍들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가다머의 말에 의하면) 그게 무슨 뜻인지 계속 생각해보다가, 얼마전 밤하늘을 보면서 이 말을 떠올려보니 소름이 끼쳤다. 그 말의 뜻은, 밤의 검은색으로 가려져 있는 부분이 실은 휘황찬란한 빛, 순수한 빛이라는 이야기였다. 따라서 우리가 밤하늘의 진짜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눈을 뜰 수조차 없을 … 계속 읽기 천구의 뒷편
[카테고리:] 일상
천둥의 신
가다머의 책을 보면, 하이데거가 지내던 토트나우베르크의 오두막집에는 그리스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뇌신雷神은 모든 것을 밝힌다 (Alles erhellt der Blitzgott)" "존재와 시간"을 학부 2학기 때 읽으려 했지만 전혀 읽히지가 않았다. 그때는 철학이 무슨 행위인지 아직 감을 못잡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철학과에 가지 않았더라면 물론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철학과에 … 계속 읽기 천둥의 신
봄, 잡상. 20160420
계절이 바뀜은 마치 건강이 달라질 때와 같은 느낌이다. 나는 이래야겠다, 저래야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몸은 벌써 비탈길을 한바탕 내려가거나, 조금 솟은 봉우리를 올라가거나, 조금 옆으로 비껴서거나 한다. 나는 겨우내 한창 그을음을 만들어 놓았다. 몸의 말을 잘 듣지 않아서 그랬던 것도 같다. 창문이란 창문이 모두 흐려지고 검어져서, 이대로 영원히 햇빛이란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런 상태의 … 계속 읽기 봄, 잡상. 20160420
총천연색
보잘 것 없었던 여름을 돌아보았다. 폭우가 내렸던 날이었다. 창문 밖에서 모든 것이 와장창 젖어버리고 있었다. 자연에게 인공이 지기를 내심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회색은 점점 번져나갔다 계절이라는 것은 신기하다. 반복해서 돌아오지만, 결코 지나간 계절의 느낌은 기억해낼 수 없다. 그저 겨울이 오면 '겨울이군'이라고 느끼고, 여름이 오면 '여름이 이런 거였지'라고 느끼는 식이 … 계속 읽기 총천연색
글조각.
누군가에게 절을 올리고 싶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지갑을 열고 싶었다. 나를 위해서 걷고 싶었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고 싶었다. 온 몸을 바닥에 던지고 싶었다. 예전에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지낼 때에도 나는 혼자 십자가에 대고 큰 절을 했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각 종교의 비의는 대단히 신체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비의의 전승은 대단한 말이나 의식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 생각에, 가장 … 계속 읽기 글조각.
잡상 2015.9.29: 자화상, 미로건축술
내가 어릴때부터 가장 깊게 느껴왔던 질문은, 내가 문화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 있다는 의식과 연관이 있었다. 사본의 사본을 보고있다는 인식, 나를 둘러싼 세계가 가짜라는 인식은 최초에는 한국-서양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었다. "문화"라는 대상의 근원이 여기가 아니라 서구라는 사실은 우월감과 컴플렉스가 묘하게 혼합된 형태로 다가왔고, 내가 서양문화를 누구보다도 게걸스럽게 섭취하게했다. 어떤 의미에서, 변방자로서의 자기인식은 나를 급속하게 서구인으로 만들어줄 … 계속 읽기 잡상 2015.9.29: 자화상, 미로건축술
잡상 2015.9.20
나는 지금 이 세계에 대한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 시대의 기술과 학문과 문화가 흘러가는 자연스러운 조류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나는 비트겐슈타인과 니체의 기본적 문제의식을 같이하고, 그 사람들의 친구이자 제자인 셈이다. 지배당하고 휩쓸려버린 옛 세계의 철학자들은 여태 스스로의 입으로 이 현상에 대해서 논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예전 체계의 사람들은 현대의 언어를 말하지 … 계속 읽기 잡상 2015.9.20
잡상 2015.9.6
헬조선에 대한 담론을 읽었다. 조선의 느리고 철저한 몰락과정을 지켜본 기억은, 조선을 후진성을 상징하는 어휘로 만들었다. 조선이 일본이 되고 일본이 한국이 되는 모습을 지켜본 세대,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할아버지께서는 집에서 조선제라면 식기마저도 사용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쇠젓가락, 쇠수저가 아니라 일본식 식기로 밥을 먹을 정도로 조선은 배척되어야 할 정신적 대상이었다. 아마 그것은 그 분께서 일본 유학중에 독일 예수회를 접하고 … 계속 읽기 잡상 2015.9.6
잡상 2015.8.31.
더 이상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불특정다수의 인정을 겨냥해서만 글을 쓸 수 있는 그런 시간도 있었지만, 이제 그렇지 않았으면 한다. 다음 주에 개강하는 과목을 위해서 Handbuch Militärischer Berufsethik(군직업윤리)를 읽는데, 핸드북의 형태다 보니 교과서의 형태가 아니고 논문집 형태로 이루어져있다. 수준이 상당히 높다. 그 중에 요헨 본Jochen Bohn이라는 뮌헨 군사대학 교수의 글을 읽고 여러 생각이 … 계속 읽기 잡상 2015.8.31.
휴일
엉망인 시간들을 보내다가, 겨우 헤집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바깥에는 처음 보는 것 같은 색들이 있었다. 여름이 다 지고나니 그 색깔을 알아보겠다. 오랜만에 카메라를 들고 나왔었다. 그 동안은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여력이 없었음을 알았다. 그냥 지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막다른 곳에 다다라서야 하게 된다. 꿈꾸듯 명상적인 기분은 지하철에서 … 계속 읽기 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