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름의 기술

  모든 철학의 기술 중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강력한 것은 모름이다. 그리스인은 이것을 경이taumazein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철학의 목적은 진리의 체험이다. 모름을 익히고 행하는 것과, 진리를 체험하는 것은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가? 방법에서 목적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모두 끊어진 느낌을 우리는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가짜는 아니다. 모름이 빛을 주는 방식이 바로 철학의 방식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면서 살아가고, 알지 … 계속 읽기 모름의 기술

헛것

  철학을 하다보면 우리는 분절되지 않은 웅얼거림을 내뱉고 싶은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빌려온 지혜이다) "정당화"나 "설득"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유약한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나는 투쟁과 논쟁에 진심으로 임해본 적이 없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근본적인 경험은, 그럴 필요가 있을때 조차,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보도록 해주었다. 길게 설명하는 글을 … 계속 읽기 헛것

비트겐슈타인 의 종교성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번역난이도가 지옥같은 이유는, 그가 일상언어의 용례를 결코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적 문제는 뭔가 전문가들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쓰는 언어와 행동양식 속에 이미 뿌리깊이 들어있다. 그냥 어떤 계기가 되면 그게 문제로 표출되는 것이지, 원래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성역이 아니다. 철학은, 안할 수 있다면 제일 좋은 것이다. 철학적 "탐구"에는 그래서 어떠한 체계도 없다. 따라서 책 <철학적 … 계속 읽기 비트겐슈타인 의 종교성

천구의 뒷편

아낙시만더Anaximander는 별들의 발광을 설명하면서, 천구 뒷편에 있는 빛이 구멍들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가다머의 말에 의하면) 그게 무슨 뜻인지 계속 생각해보다가, 얼마전 밤하늘을 보면서 이 말을 떠올려보니 소름이 끼쳤다. 그 말의 뜻은, 밤의 검은색으로 가려져 있는 부분이 실은 휘황찬란한 빛, 순수한 빛이라는 이야기였다. 따라서 우리가 밤하늘의 진짜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눈을 뜰 수조차 없을 … 계속 읽기 천구의 뒷편

천둥의 신

가다머의 책을 보면, 하이데거가 지내던 토트나우베르크의 오두막집에는 그리스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뇌신雷神은 모든 것을 밝힌다 (Alles erhellt der Blitzgott)" "존재와 시간"을 학부 2학기 때 읽으려 했지만 전혀 읽히지가 않았다. 그때는 철학이 무슨 행위인지 아직 감을 못잡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철학과에 가지 않았더라면 물론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철학과에 … 계속 읽기 천둥의 신

시멘트

옛날에 썼던 글이 나와서 한국어로 옮겨보았다. 독어를 너무 많이 잊어서 그런지 오히려 번역이 수월했다. 지금이라면 이런 글을 쓰지 않을텐데, 라고 생각했다. Trinker Zement musste ich trinken für uns, einen aufrechten Gang Auf die Wiederkehr der toten Heiligen tranken wir, reines dunkles Lichtgewebe jede Nacht verschlungen, gegeneinander Glasscherben schlucktest Du, rubinrote Werbungen, ungläubig, dass ich aus Blut … 계속 읽기 시멘트

봄, 잡상. 20160420

계절이 바뀜은 마치 건강이 달라질 때와 같은 느낌이다. 나는 이래야겠다, 저래야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몸은  벌써 비탈길을 한바탕 내려가거나, 조금 솟은 봉우리를 올라가거나, 조금 옆으로 비껴서거나 한다. 나는 겨우내 한창 그을음을 만들어 놓았다. 몸의 말을 잘 듣지 않아서 그랬던 것도 같다. 창문이란 창문이 모두 흐려지고 검어져서, 이대로 영원히 햇빛이란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런 상태의 … 계속 읽기 봄, 잡상. 20160420

철학적 탐구 서문, 1번 지적

철학적 탐구   진보라는 것은 원래 본모습보다 훨씬 크게 보이는 법이다. (네스트로이)   서문   다음 글에서 나는 생각들, 지난 16년간 내가 몰두했던 철학적 탐구들의 집약을 공개한다. 여기에는 의미·이해·문장·논리의 개념, 수학의 기초, 의식상태 등 많은 대상들이 해당된다. 나는 이 모든 생각들을 전부 지적들, 즉 짧은 문단의 형태로 집필했다. 그러면서 한 대상에 대한 긴 사슬들을 이루며 … 계속 읽기 철학적 탐구 서문, 1번 지적

철학적 탐구 89-133번 지적 번

<<철학적 탐구>> §§89-133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박술 역 89. 이러한 고찰들과 더불어, 우리는 다음의 문제가 서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논리는 어떤 의미에서 숭고한 것인가? 이유인즉, 논리에는 어떤 특별한 깊이 - 보편적인 의미 - 가 부여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논리는 모든 학문의 기저에 놓여있다고, 그렇게 비춰졌다. - 논리적 관찰은 만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사물들의 기저를 … 계속 읽기 철학적 탐구 89-133번 지적 번

총천연색

  보잘 것 없었던 여름을 돌아보았다. 폭우가 내렸던 날이었다. 창문 밖에서 모든 것이 와장창 젖어버리고 있었다. 자연에게 인공이 지기를 내심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회색은 점점 번져나갔다       계절이라는 것은 신기하다. 반복해서 돌아오지만, 결코 지나간 계절의 느낌은 기억해낼 수 없다. 그저 겨울이 오면 '겨울이군'이라고 느끼고, 여름이 오면 '여름이 이런 거였지'라고 느끼는 식이 … 계속 읽기 총천연색